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묘청의 난 (문단 편집) === 지구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의 항전은 끝나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는 당시 서경이 워낙 견고한 요새이기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경은 고려의 주적인 북방 유목민들을 막아내는데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고려에서 성을 견고하게 만들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요전쟁 때도 요나라군이 서경 공략만은 피할 정도.] 여름이 다가오는 시기에 이르자, 김부식은 장마를 틈탄 적의 기습을 염려하여, 서경 주변에 여러 개의 성을 증축하고 교전을 피했으며, 주진의 병사들은 돌아가며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리하여 관군은 병장기를 모으고 양곡을 쌓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등 장기전에 돌입했다. 간혹 반군이 습격해오는 교전이 있었으나 전세에 유의미한 수준의 영향은 없었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조서를 보내 적을 귀순시킬 것을 당부했으므로, 김부식은 반군의 간첩을 잡더라도 옷과 음식을 주어 돌려보내는 등 반군의 회유에 신경썼다. 이에 서경에서는 고려로 오는 금나라 사절을 살해하여 고려와 금 간의 불화를 일으킴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다.[* 칭제건원, 금국정벌 등을 주장했다는 이유 때문에, 서경 세력은 개경 세력과 달리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처럼 외세를 이용해 나라에 해악을 끼치려 한 자들에게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의문이다.][* 한국사를 배우다 보면, 이처럼 이분법적 사고로 점철된 시각으로 역사를 재단한 내용을 보는 경우가 간혹 있다.(예를 들면, 훈구파와 사림파를 비교할 때, '사림파가 기자를 숭배하는 등 사대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과 달리 훈구파는 단군을 중시하는 자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훈구파는 세조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공신 세력에서 비롯되었고, 사림파는 그런 기득권층을 비판하며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다. 조선의 기자 숭배가 중국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감안하면, 사림파를 사대주의자라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친일파가 반공을 외친 것을 생각하면, 훈구파의 성향이 자주적이라는 말 역시 제대로 된 평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역사, 아니 어느 분야에서든,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 등을 흑백논리에 따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관군이 이미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서경군은 관군의 문서를 위조해 사람들에게 보이며, "포로와 항복한 사람들 모두 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거짓 선전하여 내부를 단속하려 했지만, '항복한 자는 후대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북방의 금나라를 비롯한 적들이 겉으로는 화친하고 있지만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알 수 없다. 이토록 전쟁을 오래 끌다가 다른 변란이 발생하면 막아낼 방도가 없으니,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적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인종으로부터 그 글을 받은 김부식은 "서경은 험준하고 수비도 여전히 탄탄하여 점령하기 어렵다. 수만 명의 병력을 오랜시간 부렸음에도 어떤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 맞으니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로 변방의 경비와 변란을 염려한다면, 병졸이 상하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인종은 그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지휘권을 계속 김부식에게 위임하였다. 그렇게 서경 포위전은 예상외로 길어졌으며 해를 넘겨 2년을 끌게 되었다. 이즈음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도 묘청의 난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 "서경에서 난동을 일어났다는데 진압하기 어렵다면 10만 대군을 보내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물론 예의상 던진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에 인종은 "서경의 적은 고립되어 형세가 나날이 곤궁해져가고 있으므로,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배려는 고맙지만,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다."며 거절했다. >(전략) >○ (중략) 이때 군대가 야영한 지 수개월이 되었는데 김부식은 바야흐로 봄과 여름이 바뀌는 시기이므로, 혹시 장마가 지며 적의 습격을 받을 것이라 우려하여 성을 쌓아 교전을 피하고, 주ㆍ진의 병사는 윤번으로 휴가하여 농사에 종사하도록 하여 지구전을 펴면서 기회를 엿보고자 하였다. (중략) 북계(北界)의 주ㆍ진과 남ㆍ서 근방의 군인들을 5개 군에 나누어 예속시켜 각각 한 성을 쌓게 하고, 또 순화현(順化縣)과 왕성강(王城江)에 각각 작은 성을 쌓게 하여 수일 만에 역사를 마쳤다. 병장기를 모으고, 양곡을 쌓고 성문을 닫아 사병들을 쉬게 하였다. 비록 혹시 적과 더불어 교전을 하여도 큰 승패가 없었으며, 혹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이 높고 참호가 깊어서 비록 화살과 돌이 미치는 곳에 살상도 많이 하였으나 관군도 역시 부상자가 났다. >왕이 근신 최부항(崔褒抗)과 원외랑 조석(趙碩) 등을 보내어 조서를 내려 적을 불러 귀순하라고 타일렀다. 부식도 또한 녹사 조서영(趙諝榮)ㆍ김자호(金子浩)ㆍ강우(康羽) 및 중 품선(品先) 등을 보내어 백방으로 타이르고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하였다. 매양 적의 간첩이나 나무꾼ㆍ풀꾼을 잡았을 때마다 모두 옷과 음식을 주어서 돌려 보냈다. 조광 등은 스스로 죄가 중함을 알기 때문에 조금도 항복할 의사는 없고, 국외에서 오는 환란이나 있어 관군이 스스로 물러나는 요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금 나라의 사절이 마침 왔는데 적은 길을 막고 사절을 살해하여 두 나라의 불화를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이를 알고 경비를 매우 엄밀히 하였기 때문에 적은 감히 발동하지 못하였다. 적은 또 그의 도당이 투항할까 염려하여 우리 중군의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서 군중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모든 군병에게 포로된 자와 항복한 사람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살해되었다." 하니, 서경의 적들이 매우 깊게 믿었으나, 얼마 후에 항복한 자를 매우 후하게 위무한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에 적들이 점점 귀순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 신하가 헌의하기를, “예로부터 군사를 쓸 때에는 마땅히 형세를 관찰할 것이요, 어찌 일시의 손실만을 계교하겠습니까. 국가에서 비록 금 나라와 화친하고 있으나 그들의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이제 수만의 군사를 일으켜 해가 차도록 결단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이웃의 적이 틈을 타서 발동하거나 도적들의 뜻하지 않은 우환이 가중한다면 어찌 제어하겠습니까. 중신을 보내어 사상(死傷)을 고려하지 말고, 기일을 엄중히 정하여 적을 격파하게 하고, 감히 피하거나 관망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죄를 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이 이것을 부식에게 이 글을 보이니 부식이 아뢰기를, “북쪽 변경의 경계와 도적의 변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음은 진실로 건의한 자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상자의 수를 계교하지 않고, 기일을 정하여 적을 격파해야 한다는 말은 이 어찌 오늘의 이해를 이같이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이 서경을 보니 천연의 험고한 지대로 쉽사리 격파해 취하기도 어렵거니와, 더욱이 성중에는 병력도 많고 수비도 엄하여 매양 장사들이 먼저 올라가서 겨우 성 밑에 이르러서는 성첩(城堞)을 뛰어 넘는 자가 없으며 높은 사다리[雲梯]나 충거(衝車)가 모두 소용이 없고, 어린애와 부녀자들도 벽돌과 기와를 던져 역시 완강한 적이 되기에 설사 5군이 모두 성에 붙어 공격한다 해도, 수일이 못 가서 용맹 있는 장수와 정예병이 모두 적의 화살과 돌에 죽을 것입니다. 적이 우리의 힘이 꺾임을 알고 북을 울리며 고함치고 나온다면,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밖으로부터 오는 의외의 우환에 대비하겠습니까. 지금 수만의 병대를 연합하여 해가 차도록 결단을 내지 못한 것은 신이 마땅히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경비와 도적의 변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온전한 계책으로 이겨 사졸도 상하지 않고 국가의 위엄도 꺾이지 않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전쟁이란 본래 빠른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제 종묘사직의 신령과 명철하신 주상의 위엄으로 요망한 적의 배은망덕쯤은 곧 멸망해 없어질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적의 토벌은 신에게 맡겨 신으로 하여금 편의대로 일을 수행케 하시면 반드시 적을 격파하여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왕도 역시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마침내 여러 사람의 논의를 물리치고 위임하였던 것이다. (중략) >○ 5군이 모여 서경의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중략) >○ 6월에 송 나라에서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들으니 서경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있다 하니 혹시 잡기가 어렵다면 10만의 병력을 내어 돕고자 한다." 하였다. (중략) >○ 9월에 오돈례가 돌아가는데 왕이 주문(奏文)에 첨부하기를, “서경의 적은 이미 그 원흉을 섬멸하였으나, 남은 적당이 서로 집합하여 험한 곳을 점거하고는 굳게 막고 있어 빨리 공격하여 격파하려면 살상이 많을 것이 우려되어 군사를 안정시키고 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기다리고 있으니 적의 형세는 날로 곤궁하여 격파되는 것은 조석에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해외의 조그마한 나라의 변방에서 일어난 세세한 사고는 족히 존위(尊威)를 번거롭게 할 것이 못 되므로 감히 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사절을 보내어 원병을 보낼 가부를 물으시니, 비록 위로 대조(大朝)에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시는 뜻에는 감격하나 다만 사리상 불편한 바 있어 감당하기 어려우며, 더욱이 해양 만리 길에 험난을 헤아릴 수 없으니, 천병이 동으로 온다는 것은 아마도 편의한 일이 아니니, 내리신 지휘를 중지하심을 바랍니다." 하였다. (후략)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4A_0110_010_0040_2000_002_XML|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